묵상 컬럼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니이다

예배에서 깨져라.
그래야 산다.

소유에서 흡수로, 무너짐에서 부어짐으로

정현승 컬럼  ·  2026 · 06 · 19
설교 영상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니이다

— 시편 51:17
I
들어가는 말 · INTRADA

"예배 시간, 핸드폰만 본다."

심방 중에 이런 말씀을 자주 듣는다. "목사님, 예배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요." "찬양이 끝나면 지쳐서요. 설교는 거의 안 들려요."

그런데 정작 찬양 시간에는 눈을 감지 않는다.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카톡 확인, 뉴스 스크롤, 주식 차트.

예배 시간에 "예배"를 안 한다. 예배가 지루한 게 아니다. 내가 안 죽어서 그렇다. 자기 자신을 안 가져와서 그렇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나간다. 그러니 영적으로는 굶은 채로 주일 7일을 버티고, 또 다음 주 일요일을 손가락 하나로 카운트다운한다.

서울에 사시는 한 교회의 집사님 이야기다. 한강 조망권 아파트에 사신다고 한다. "창밖이 좋으시겠어요." "전 커텐 치고 살아요."

풍요 속에 있는 사람은 굶주림을 모른다. 시기에 차 있으면 배고픔도 못 느낀다. 그런데 영적 배고픔이 없으면 예배도 굶는다.

II
예배의 본질 · ESSENCE

"예배는 내가 없어지는 시간이다."

많은 분들이 예배를 "받으러" 오는 시간으로 안다. 위로 받으러, 평안 받으러, 용서 받으러.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반대다. 예배는 "내가 없어지는 시간"이다. 내가 깨지는 시간이다. 내가 가루가 되는 시간이다.

"내 제물, 내 봉사, 내 헌신" — 이 모든 "내"가 다 부서져야 하나님이 거기 채워지신다.

성경은 이걸 두 단어로 말한다. 소유흡수.

인간의 본능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내 하나님, 내 교회, 내 신앙, 내 구원. 손바닥 안에 하나님을 담아서 내 주머니에 넣고 싶어 한다. 필요할 때 꺼내 쓰고, 안 맞으면 다른 신으로 바꾼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사용되시도록 오신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주 안에서" 사는 것 — 이건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흡수되는 것이다. 빚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빚이 가루가 되어 빵이 되는 것. 그 가루가 나 자신이다.

예배 = 소유의 내가 사라지고, 흡수된 내가 만들어지는 시간.본문 中

그런데 정작 예배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나. 내 감정 살리려고, 내 상처 위로하려고, 내 기분 맞추려고 온다. 그러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영적 쇼핑"이다.

빚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빚이 가루가 되어 빵이 되는 것.
그 가루가 나 자신이다.
III
제물의 차이 · ABEL & CAIN

가인과 아벨, 제물의 차이가 아니라 '나'의 차이다.

성경 첫 번째 살인.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왜 죽였을까. 시기? 부러움? 그런 표면의 이유로만 보면 가인이 불쌍해진다. 그런데 성경은 더 깊이 보여준다.

가인은 자기는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을 "소유"하려 했다. 제물은 드렸지만, 자기 자신은 안 드렸다. 아벨은 달랐다. 제물처럼 자기를 죽여서 드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제물이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었다. 드리는 "나"가 죽었느냐, 살아있느냐의 문제였다.

가인은 하나님을 안 받으시니까 분노했다. 분노의 끝에 아벨을 죽였다. 소유 의식이 폭력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다 실패하면, 경쟁자를 제거하려 든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상처받는 많은 일들. "나만 인정 안 받았어." "내 의견이 안 받아들여졌어." "내 봉헌이 안 보였나 봐." 거의 다 이 가인의 마음이다.

예배 시간에 내 가인이 살아있다면, 그 예배는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무기로 둔갑한다. 아벨처럼 제물과 함께 자기를 죽여서 드려야 한다. 그래야 예배가 된다.

IV
순종의 훈련 · OBEDIENCE

모세의 성막, "명령하신 대로" 16번.

출애굽 후 광야에서 모세가 한 일. 하나님이 명하셨다. "성막을 짓아라."

그런데 모세는 지식을 총동원했다. 애굽의 학문으로 디자인했다. 이집트의 공예 기술을 쏟아부었다. 뛰어난 장인들이 자기 솜씨로 화려하게 만들었다.

결과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으셨다.

다시 지으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명령하신 대로"만 하게 하셨다. 출애굽기 39-40장에 "명령하신 대로"라는 말이 16번 나온다. 이해해서가 아니다. 16번 "그냥" 한 것이다.

모세도 그게 이해가 안 됐다.

"주님, 이게 더 좋아 보이는데 왜 다시 해요?"

그래도 명령하신 대로 했다. 그제야 구름이 임하고, 영광이 충만했다.

모세의 탁월성은 지식이 아니었다. 빛나는 학력도 아니었다. 군사 전략도 아니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 아니면 멈춰 서리다." 그 한 마디가 모세의 40년이었다.

고난의 목적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난을 통해 뭔가 깨달았어요." 그런데 깨달음의 본질은 "내가 판단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기 의와 다를 바 없다.

고난의 목적은 단 하나, 순종이다. 예수님조차 그러셨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히브리서 5:8

예배도 그렇다. 내가 이해한 만큼, 내 감정에 맞는 만큼, 내 뜻에 맞는 만큼. 그래서는 예배가 아니다. "명령하신 대로" 자기 뜻을 내려놓는 순간. 그때 예배가 시작된다.

V
성찬의 회복 · COMMUNION

"깨질 때, 비로소 부끄러움이 깨어난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수용소 이야기다. 굶주린 포로들 앞에 독일군이 빵 하나를 던졌다.

사람들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서로 밀치고, 빼앗고, 욕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그런데 빵을 주운 한 포로가 소리쳤다.

"여러분! 이걸로 성찬식 합시다!"

순간 분위기가 뒤집혔다. 모두가 부끄러워졌다. 짐승처럼 서로 찢던 사람들. 거룩한 떡을 함께 나누는 성찬 공동체가 되었다. 독일군도 꼼짝을 못했다.

부끄러움이 깨어난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풍요 속에서는 이 부끄러움이 안 온다.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이 가득한 다섯 살이 말한다. "싫어요, 살쪄요."

성찬의 떡도 그렇다. 평일에는 매 끼니 풍족하게 먹고, 주일에는 새벽부터 배부를 때까지 먹고, 예배 시간에 "너무 배불러서" 졸다가 나온다. 그러면 성찬이 성찬이 아니다. 빵을 먹는 행위일 뿐이다.

예배는 부끄러움이 깨어나는 시간이어야 한다. "주님, 제가 이 자리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맞습니까?" 이 한 마디가 떨어질 때 예배가 시작된다. 그 부끄러움이 생명이다.

예배에서 깨어나는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VI
출애굽의 목적 · FREEDOM

"예배자, 노예의 반대말이다."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많은 분들이 "자유"라 답한다.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성경에서 노예의 반대말은 "자유인이" 아니다. "예배자"이다.

노예는 누구의 종이냐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된다. 바로의 종이면 바로의 노예. 돈의 종이면 돈의 노예. 인정의 종이면 인정의 노예.

예배자는 누구의 종이냐.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 앞에 자원하여 서는 자 (출 21장). 강제 노역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자 (출 25:2).

예배자가 되지 못하면 반드시 다른 무언가의 노예가 된다. 중립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먼저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들으면 내가 너희에게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특별한 보물이 되게 하리라."

언약이 먼저. 예배가 먼저. 영이 먼저 살면 육적 충성은 따라온다.

그런데 우리 예배는 그렇지 않다. "목사님, 우리 교회 활기 있어요. 새벽기도도 잘 나오고, 봉사도 많아요."

그런데 정작 예배는 피곤하다. 왜? 영 없이 육만 앞서 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도, 봉사도, 1등 다이어트처럼 "해야 할 일"이 되어 있다. 그러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성능 좋은 노예"의 일이다.

출애굽의 목적은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섬기고 싶은 분을 섬기는 자유"다.

VII
맺는 말 · FINALE

"예배에서 깨져야 산다."

길지 않은 인생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받으려고 예배에 온다. 평안을, 용서를, 위로, 능력, 건강, 사업 번창.

그런데 예배는 받는 자리가 아니다. 내리는 자리다. 깎이는 자리다. 부서지는 자리다.

"주여, 나를 깨뜨려 주옵소서." 이 기도가 진짜 예배다.

"명령하신 대로" 내려놓을 때, 가인처럼 자기만 살아있던 내가 아벨처럼 제물과 함께 죽을 때, 빵을 주워서 "성찬식 합시다!" 외칠 때, "주님, 제가 이런 삶 살고 있는 게 맞습니까?" 부끄러워할 때 —

그 자리가 예배다.

그 자리는 내 인생이 무너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채우시는 자리다. 가루가 된 자리, 빵이 되는 자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빌 4:13)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예배에서 깨어나는 부끄러움은 부끌러움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예배는 끝나야 끝이 아니다. 예배가 무너져야 산다. 예배에서 깨어나야 주일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번 주 일요일. 핸드폰을 좀 내려놓으라. 감정을 좀 놓으라. "내 예배"라는 마음을 좀 부수라. 빈손으로 가서, 깬 마음으로 돌아오라.

그래야 끝이 좋다.

예배는 끝나야 끝이 아니다.
예배가 무너져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