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제까지는 믿었는데, 오늘은 못 믿을까
믿음의 생활에서 가장 솔직한 고백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제는 분명히 느껴졌는데, 오늘은 안 느껴져요."
그 감각이 사라진 날, 우리는 흔히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가 믿음을 잃었나 보다." 신앙이 식었다고, 하나님이 멀어졌다고, 어제는 가까웠던 분이 오늘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그런데 잠깐, 멈춰 봅니다. 정말 그게 믿음이었을까요? 아니면 느낌이었을까요?
확신이 흔들릴 때, 우리는 어떻게 서 있는가
정현승 목사 · 2026 · 06 · 0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믿음의 생활에서 가장 솔직한 고백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제는 분명히 느껴졌는데, 오늘은 안 느껴져요."
그 감각이 사라진 날, 우리는 흔히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가 믿음을 잃었나 보다." 신앙이 식었다고, 하나님이 멀어졌다고, 어제는 가까웠던 분이 오늘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그런데 잠깐, 멈춰 봅니다. 정말 그게 믿음이었을까요? 아니면 느낌이었을까요?
느낌은 감각입니다. 오르락내리락하고, 조명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집니다. 어제 밤에 눈물을 흘리며 찬양했다가,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옅어져 있기도 합니다.
믿음은 다릅니다. 느낌이 전제되지 않아도 서 있는 것. 감각이 닿지 않아도 붙드는 것. 바라 것들의 실상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 실상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굳건히 기대어 서는 자리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느낌이 사라졌다고 신앙이 무너진 건 아닙니다. 신앙은 감각이 아니라 선택의 자리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갈릴리 바다의 밤입니다. 제자들은 뱃머리에 매달려 있고, 파도가 배를 채우고, 바람이 거세게 불어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외칩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들의 두려움은 진짜였습니다. 죽음 앞에 선 두려움. 거기에 위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 안에서도, 그들은 결국 주여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느낌은 무서웠지만, 부르는 이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가 잔잔해지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대로를 짚어 주신 것입니다. 파도가 무서운 게 아니라, 내가 그분 안에 있는지 잊어버린 것. 신앙은 파도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잔잔해지지 않아도 그분이 함께 계심을 붙드는 일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분기점이 생깁니다. 감각이 살아 있을 때 신앙인은 잘 기도하고, 잘 찬양하고, 잘 묵상합니다. 그런데 감각이 사라진 날, 무너질 것 같은 날, 어떻게 붙드느냐.
성경은 그 자리에 습관을 놓습니다. 느낌이 전제되지 않는 말. 말씀을 펼치고, 입으로 읽고, 귀가 듣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실제입니다.
느낌으로 시작하는 기도는 흔들립니다. 말씀으로 서는 기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내 감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을 다시 읽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실상(hypostasis)이라는 헬라어는 무언가의 본질, 그것이 실제로 서 있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아직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진짜로 거기 있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계신다고 느끼지 못하는 날에도 그 사람은 거기 있습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아도 부는 것처럼, 하나님은 느껴지지 않아도 계십니다.
믿음은 그 자리에서, 보지 못해도 서 있는 힘을 찾는 일입니다.
파도가 무서운 게 아니라,
내가 그분 안에 있는지 잊어버린 것이다.